꼴찌도 1,500억? EPL 중계권료의 마법

전 세계 축구 팬들이 밤잠을 설치며 시청하는 유럽 프로축구. 그중에서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세계적인 인기와 자본력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스포츠 경제학의 관점에서 EPL을 들여다보면 아주 기묘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꼴찌를 한 팀조차 다른 유럽 빅리그의 우승권 팀과 맞먹는 수준의 중계권료 배분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2024/25 시즌 EPL 최하위였던 사우샘프턴은 리그 중앙 배분금으로 약 1억920만 파운드를 받았습니다. 반면 같은 시즌 스페인 라리가에서 방송수익 배분을 가장 많이 받은 레알 마드리드는 약 1억5,792만 유로,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는 인터 밀란이 약 8,200만 유로 수준으로 집계됐습니다. 계산 기준과 환율이 서로 달라 단순 비교에는 주의가 필요하지만, EPL 하위권 구단의 중계권 수익 규모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실력과 성적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프로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런 현상이 발생할 수 있을까요?

이번에는 프리미어리그를 세계 최고의 돈잔치 무대로 만든 핵심 비결, '중계권료 분배 방식'의 경제학을 살펴보겠습니다.


📺 파이의 크기가 다르다, 천문학적인 글로벌 중계권료

첫 번째 이유는 근본적인 '파이(시장)의 크기'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프리미어리그는 영국 내 TV 중계권뿐만 아니라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 전 세계 각 지역의 방송사에 중계권을 판매합니다.

현재 2025/26~2027/28 시즌에도 EPL은 세계 각 지역의 방송사들과 별도의 중계권 계약을 체결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쿠팡플레이가 중계권을 보유하고 있고, 미국 NBC, 중동·북아프리카 beIN Sports, 남아시아 JioStar 등 각 지역의 방송사가 권리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EPL의 세계적인 중계권 규모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숫자가 있습니다.

영국 국내 중계권만 해도 2025/26~2028/29 4년간 총 67억 파운드에 달합니다. 이는 당시 기준 영국에서 체결된 최대 규모의 스포츠 미디어 중계권 계약입니다.

물론 EPL의 인기가 단순히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오랜 기간 세계 각국에 리그를 적극적으로 중계하고, 유명 선수와 감독을 영입하며, 경기 자체를 하나의 글로벌 엔터테인먼트 상품으로 만들어 온 결과가 지금의 거대한 시장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실제로 EPL은 2024/25 시즌 기준 전 세계 193개국 중 189개국에서 경기가 생중계될 정도로 광범위한 글로벌 도달 범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 EPL 흥행의 진짜 비결, '균등 분배'의 마법

파이가 아무리 커도 일부 구단이 대부분을 독식한다면 리그 전체의 경쟁력은 떨어질 수 있습니다.
프리미어리그가 전 세계에서 가장 치열하고 재미있는 리그가 된 이유는 바로 이 막대한 중계권 수익을 나누는 '분배의 룰(Rule)'에 있습니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리그처럼 보이지만, EPL의 국내 중계권료 분배 구조는 꽤나 평등합니다.

핵심은 흔히 '50 : 25 : 25'라고 설명하는 구조입니다.

  • 50% — 균등 분배: 수익의 절반은 20개 구단에 똑같이 나눠줍니다.
  • 25% — 성과 배당(Merit Payment): 최종 리그 순위에 따라 차등 지급합니다.
  • 25% — 시설 배당(Facility Fee): 영국 내에서 해당 구단의 경기가 TV로 생중계된 횟수에 따라 지급합니다.

즉, 꼴찌를 했다고 해서 중계권료가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지는 구조가 아닙니다. 20위 팀도 상당한 금액을 기본적으로 확보한 뒤, 순위와 TV 노출에 따라 추가 금액을 받는 방식입니다.

2024/25 시즌을 보면 이 구조가 얼마나 강력한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승팀 리버풀은 EPL 중앙 배분금으로 약 £174.9m, 최하위 사우샘프턴도 약 £109.2m를 받았습니다.
1위와 20위의 차이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다른 리그와 비교하면 그 격차가 상당히 작은 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해외 중계권료는 현재 완전히 똑같이 나누는 구조가 아닙니다.

기존 해외 중계권 수익은 균등하게 나누지만, 2019/20 시즌부터 발생하는 해외 중계권료 증가분은 리그 순위에 따라 일부 차등 배분하도록 바뀌었습니다.
이처럼 EPL은 상위권 구단이 더 많은 돈을 가져가면서도, 하위권 구단 역시 막대한 기본 수익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구조가 '강팀만 계속 강해지는 리그'가 아니라, 중하위권 팀도 좋은 선수를 영입하고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중요한 배경 중 하나입니다.


👑 라리가도 이제는 중앙 판매 방식이다

EPL과 비교할 때 자주 언급되는 사례가 스페인 라리가입니다.
과거 스페인에서는 각 구단이 개별적으로 방송권을 판매하는 구조가 강했고, 이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같은 인기 구단과 나머지 구단 사이의 수익 격차가 컸습니다.

하지만 이 구조는 현재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페인은 2015년 Royal Decree-Law 5/2015를 통해 프로축구 중계권의 중앙 판매와 수익 분배 체계를 법제화했습니다. 이후 라리가 역시 리그 차원에서 방송권을 공동으로 판매하고, 정해진 기준에 따라 구단들에게 수익을 배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EPL과 완전히 같은 구조가 된 것은 아닙니다.
2024/25 시즌 라리가의 방송수익 배분을 보면 레알 마드리드가 약 €157.9m, 바르셀로나가 약 €156.5m,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약 €108.2m을 받은 반면, 하위권 구단들은 €40m 안팎까지 내려갑니다.

즉, 라리가 역시 과거보다 분배 구조를 개선했지만 EPL만큼 상·하위권의 격차가 좁은 것은 아닙니다.

이 차이가 바로 EPL의 강력한 경쟁 구조를 설명할 때 자주 언급되는 부분입니다.



📉 강등의 공포와 '낙하산 배당금(Parachute Payment)'

EPL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중계권 수익을 받을 수 있다 보니, 반대로 챔피언십으로 떨어지는 '강등'은 구단에게 엄청난 재정 충격이 됩니다.

하지만 EPL에는 이 충격을 조금 완화하기 위한 안전장치가 있습니다.
바로 '낙하산 배당금(Parachute Payment)'입니다.

EPL에서 강등된 구단은 챔피언십으로 내려간 뒤에도 일정 기간 동안 EPL 중계권 수익을 기반으로 한 지원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현재 제도에서는 일반적으로 강등 첫해에 EPL에서 균등하게 배분되는 중계권 수익의 55%, 두 번째 해에는 45%, 세 번째 해에는 20% 수준의 낙하산 배당이 적용됩니다. 다만 EPL에 한 시즌만 머물렀던 팀은 세 번째 해의 20% 지급 대상이 되지 않는 등 세부 조건이 있습니다.

이 제도의 목적은 단순합니다.
갑자기 수입이 급감한 강등 구단이 선수단과 구단 운영을 한꺼번에 무너뜨리지 않고, 다시 승격을 노릴 수 있도록 재정적 완충 장치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EPL에서는 승격과 강등이 단순히 축구 경기의 결과를 넘어, 구단의 재정 구조 자체를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이 됩니다.


💡 결국 EPL의 진짜 경쟁력은 '돈을 버는 방식'에 있다

프리미어리그의 성공을 단순히 "중계권료가 엄청나게 비싸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크게 만든 파이를 어떻게 나누느냐입니다.

EPL은 인기 구단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도록 성적과 TV 노출에 따른 차등 배분을 유지하면서도, 모든 구단이 상당한 규모의 기본 수익을 확보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래서 꼴찌 팀도 쉽게 무너지지 않고, 중하위권 구단도 다시 좋은 선수를 영입해 경쟁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시스템이 완벽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EPL과 다른 유럽 리그의 재정 격차가 커지는 문제도 있고, 강등과 승격에 따른 재정 불균형 역시 여전히 큰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럼에도 EPL의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분명합니다.

프로 스포츠에서 '누가 가장 많이 가져가느냐'만큼이나 '리그 전체가 어떻게 돈을 나누느냐'가 경쟁력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TV로 보는 한 경기 뒤에는 선수들의 실력뿐만 아니라, 중계권을 팔고 그 돈을 다시 20개 구단에 나누는 거대한 비즈니스 구조가 숨어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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