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이름이 돈이 되는 이유: 네이밍 라이츠의 경제학과 KBO의 변화
과거 프로 스포츠 구단들의 홈구장 이름은 지역 지명이나 구단의 유서 깊은 상징을 따서 짓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양키 스타디움(뉴욕 양키스), 캄 노우(FC 바르셀로나), 올드 트래포드(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말이죠.
하지만 최근 스포츠 뉴스를 보거나 경기장을 찾다 보면, 낯선 기업의 이름이 경기장 간판에 큼지막하게 걸려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구장은 과거 퍼시픽 벨 파크, SBC 파크, AT&T 파크를 거쳐 현재는 오라클 파크(Oracle Park)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스널의 홈구장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불립니다.
매년 프로야구 시즌이면 우리에게 익숙한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창원 NC 파크'라는 이름 뒤에도 수백억 원의 돈이 오가는 거대한 스포츠 마케팅의 정수, '네이밍 라이츠(Naming Rights·명명권)'의 경제학이 숨어 있습니다.
구단은 어떻게 경기장 이름 하나로 수백억 원의 수익을 올리는지, 그리고 유독 한국 프로야구(KBO)에서는 이 제도가 정착하기까지 왜 지자체와의 치열한 '쩐의 전쟁'을 치러야 했는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 경기장 이름표를 돈으로 산다? 네이밍 라이츠의 개념
네이밍 라이츠(Naming Rights)는 기업이 프로 스포츠 구단이나 경기장 소유주에게 막대한 금액(후원금)을 지불하는 대신, 일정 기간 동안 경기장 공식 명칭에 자사의 브랜드나 기업명을 붙일 수 있는 권리를 뜻합니다.
우리말로는 '구장 명명권'이라고 부르는 이 제도가 스포츠 비즈니스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대표적인 초기 사례로 1973년 미국 NFL 버펄로 빌스의 홈구장 '리치 스타디움(Rich Stadium)'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식품기업 리치 프로덕츠(Rich Products)는 25년간 150만 달러를 지불하고 경기장 명칭에 자사의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이 계약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경기장 네이밍 라이츠를 대표하는 초기 사례로 자주 언급됩니다.
이후 경기장 건설비와 구단 운영비가 커지고 스포츠 중계와 미디어 노출 가치가 높아지면서, 네이밍 라이츠는 전 세계 스포츠 시장에서 중요한 스폰서십 수익 모델 가운데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 기업들은 왜 보이지 않는 이름에 거액을 쏟아부을까?
단순히 경기장 건물에 회사 간판 하나를 다는 것에 불과해 보이는 이 권리에 기업들이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붓는 이유는 철저한 미디어 노출 효과 때문입니다.
- 미디어 노출의 절대적 법칙: 프로야구나 프로축구 경기는 TV 생중계, 스포츠 뉴스, 지면 기사, 유튜브 하이라이트에 매일같이 노출됩니다. 아나운서나 해설자가 경기장 이름을 언급하는 순간 기업 브랜드도 함께 노출되는 구조입니다.
- 단순 노출 효과(Mere Exposure Effect): 심리학에서는 소비자가 특정 대상을 반복적으로 접하면서 친숙함을 느끼는 현상을 단순 노출 효과라고 설명합니다. 경기장 이름에 기업 브랜드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면, 기업 입장에서는 브랜드 인지도를 높이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경기장 이름 하나가 곧바로 수익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경기장 명칭 자체가 방송과 기사, 검색 결과 등에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이 네이밍 라이츠의 중요한 가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 UEFA에서는 왜 경기장 이름과 다르게 취급할까
하지만 UEFA 챔피언스리그 경기가 열릴 때는 UEFA가 정한 공식 표기와 상업적 표시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에, 평소 경기장에서 보던 스폰서 브랜드가 그대로 노출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실제로 UEFA는 챔피언스리그 경기에서 뮌헨의 경기장을 'Munich Football Arena', 아스널의 경기장을 'Arsenal Stadium'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 KBO 리그의 네이밍 라이츠, 지자체와의 쩐의 전쟁
-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기아자동차는 광주 신축 구장 건립 과정에서 300억 원을 부담했고, 그 대가로 광주시로부터 25년간 야구장 운영권·광고권·명칭 사용권을 허가받았습니다. 당시 광주시는 이 300억 원이 야구장 건립 재원을 마련하는 데 사용됐다고 설명했습니다.
-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 한화 이글스는 대전시와 새 구장 사용·수익 계약을 체결하면서 구장 명칭권과 광고권 등의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이후 한화생명과 25년간 네이밍 라이츠 스폰서십 계약을 맺으면서 현재의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라는 이름이 만들어졌습니다.
반면 서울 잠실야구장처럼 지자체가 소유한 경기장에서는 구단이 독자적으로 네이밍 라이츠를 판매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 히어로즈 → 넥센 히어로즈 → 키움 히어로즈로 이어진 이 모델은 경기장이 아니라 구단 자체의 이름을 스폰서 브랜드와 결합한 사례입니다.
히어로즈는 모기업이 없는 구조에서 네이밍 스폰서를 통해 운영 재원을 확보해 왔으며, 2010년 넥센타이어와 계약하면서 '넥센 히어로즈'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2019년부터 키움증권과의 계약으로 '키움 히어로즈'가 됐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경기장 네이밍 라이츠가 아니라 구단 네이밍 스폰서십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이름에 기업 브랜드를 붙여 스폰서십 가치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큰 틀에서는 네이밍 마케팅의 흥미로운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추가로 알면 좋은 네이밍 라이츠 상식 (FAQ)
A1. 네이밍 라이츠는 일정 기간 동안 경기장 명칭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판매하는 계약이므로, 계약이 종료되고 재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경기장 이름이 바뀔 수 있습니다.
다만 계약 기간은 경기장과 계약 조건에 따라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보통 5~20년'이라고들 하지만 일률적으로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오라클의 계약은 20년으로 체결됐고, 대전 한화생명 볼파크 역시 25년 네이밍 라이츠 스폰서십 계약이 체결됐습니다.
A2. 물론 있습니다. 전통과 낭만을 중시하는 스포츠 팬들에게는 오랫동안 불려온 경기장 이름이 기업 브랜드로 바뀌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구단이나 경기장 운영 주체 입장에서는 네이밍 라이츠가 시설 운영과 스포츠 사업에 필요한 추가적인 수익원을 확보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네이밍 라이츠는 브랜드 노출을 원하는 기업과 새로운 수익원을 원하는 스포츠 구단·시설 운영 주체가 서로의 필요를 맞바꾸는 스폰서십 모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외의 스포츠 마케팅 사례와 KBO 리그의 현실을 비교해 보면, 경기장 이름 하나에도 단순한 광고 이상의 복잡한 비즈니스 구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경기장 이름을 판매하는 행위는 단순한 상업화로만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구단과 경기장 운영 주체가 추가적인 수익원을 확보하고 스포츠 산업의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새로운 스포츠 인프라가 구축되는 과정에서도 지자체와 구단, 기업이 서로의 권리와 이익을 조율하면서 상생할 수 있는 다양한 스포츠 마케팅 모델이 등장할지 지켜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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